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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학교육연구소 작성일 : 2009.06.10 조회수 :811
대학마다 학과제 도입 논의가 한창이다. 정부가 2009년 1월 19일 ‘고등교육법시행령’ 제28조 제2항 ‘모집단위를 정함에 있어서 대학은 복수의 학과 또는 학부별로 이를 정한다’는 규정을 삭제해 강제적인 학부제 시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학과제에서 학부제로 강제 전환
1994년 이전까지 전국의 모든 대학은 학과체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이 집권하고 1994년 ‘학과 통합 정책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학부제로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교육부는 학과 통·폐합 결과를 행·재정 지원 사업에 반영하고, 대교협이 주관한 ‘대학종합평가인정제’에도 반영했다. 이에 따라 대학의 학과 통·폐합 및 학부제 도입이 본격화 된 것이다.
이후 김영삼정부는 ‘5·31교육개혁안’을 발표하면서 △대학을 다양화, 특성화하여 사회 각 분야가 요구하는 다양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고 △학사운영을 자율화하고 △다전공, 복합학문 연구가 가능하도록 총 이수학점의 1/4~1/6 수준의 최소전공인정학점제를 도입하기로 함에 따라 대학에서는 학부제 도입 열풍이 불었으며, 1997년 당시 전국 94개 대학이 학부제를 부분 또는 전면 도입했다.
김영삼정부는 아울러 1997년 11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1999학년도부터 학생 모집단위를 2개 이상 학과나 학부별로 모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제28조)해 대학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학부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학부제 도입 이후 문제점 속출
학부제 시행 이후 교육부 의도와 달리 심각한 문제점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다수 대학들이 학문적 연관성이 전혀 없는 학과를 통·폐합 하거나 정부의 강행 방침에 마지못해 따라간 나머지 기존의 학과들을 묶어 학부라고 명칭을 붙이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또 ‘학생들의 전공선택권 보장’이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학생들은 취업이 잘되는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 당국 역시 학생들 구미에 맞는 ‘듣도 보도 못한’ 전공을 개설하는 상황에 이르러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간의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전공은 적정 인원 이상이 몰리면서 대형 강의와 교수 및 기자재 부족 등으로 인해 부실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학부제로 인해 대학에서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사장되면서 비판정신이 사라졌고, 기초학문이 붕괴되면서 대학이 ‘시장화’와 ‘취업훈련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근래 들어 지방자치단체나 시민사회 등에서 인문학 강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과도 정면 배치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학부제로 인한 폐단은 상당수 대학이 35~40학점에 불과한 최소전공인정학점제를 도입하면서 전공교육 부실로 이어지고, 교수들은 과다한 학부 학생들로 인해 학생지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울러 학생들도 공동체 문화가 파괴되어 극단적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옆의 친구는 보다 유리한 전공 선택을 위한 치열한 경쟁 상대의 하나일 뿐이었다.
설명 없이 슬그머니 학부제 거둬들인 정부
당시 교육부는 학과제로 인해 △학사과정 통합화의 세계적 경향에 역행하고 △고등교육 투자의 비효율을 초래하며 △학과별 교과과정 편성에 따른 경영의 비효율과 △시설·설비 중복 투자, △학생들의 교과목 선택 제한 △학과간의 폐쇄성을 초래한다며 학과 통·폐합과 학부제를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학부제 도입 이후 학과제의 폐단이 개선된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자 대학 총장들을 비롯해 많은 교육관련 단체에서 시정과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우리 연구소도 학부제 논의 과정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학부제 도입 반대와 폐지를 수차례에 걸쳐 요구([대교연 논평] 학부제 폐지와 함께 대학정책도 전면 수정돼야(080519), [대교연 논평] 학부제 실패에서 교훈 찾아야(030512), [대교연 논평 강압적 학부제 정책 서둘러 폐기해야(020624))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들은 채도 않다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학부제 정책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그것도 합당한 설명 없이 단순한 ‘대학 자율화 조치’ 일환으로 말이다. 교육 관료들의 잘못된 정책 집행이 대학 구성원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학부제 정책 실패는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어봐야 할 부분은 정책이 실패 했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관료들은 문제가 뻔히 보이는 정책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물론 국민의정부 시절 ‘정책결정과 집행과정에 참여한 관련자들의 실명 및 관련기록 등을 기록^보존하도록 하여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여 행정의 책임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책실명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법적으로 명문화되어 있어도 유명무실하게 운영되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과제 전환 허용과 정부 정책의 모순
그런데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 당국이 학부제를 추진한 근본 배경이 대학에서는 학부제를 통해 기초전공 과정을 습득하고 대학원에서 전공심화 과정을 밟게 하는데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가 ‘대학원중심대학 또는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표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대학원중심대학 또는 연구중심대학’ 육성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그 기초 토대인 학부제를 대학 자율에 맡기겠다는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 학과제 전환 방침을 밝힌 일부 대학은 다양한 조건을 걸고 있고, 나머지 대학들도 구체적인 학과제 전환 방안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으로 학과제 전환이 본격화되면 대학 사회 논란은 더욱 격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학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정부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대학원중심대학이나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하고 있는 대규모 대학들은 어느 선까지 학과제로 전환하는 것이 차후에 불이익을 받지 않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턱대고 학과제로 전환했다가 정부가 ‘대학원중심대학이나 연구중심대학’ 선정 과정에서 불이익을 줄 경우 대학이 입을 피해는 막대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공개 평가 해야
대학들이 합리적으로 학과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대학원중심대학과 연구중심대학’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학 자율에만 맡겨둘 경우 극심한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울러 정부와 대학당국은 학부제 10년에 대한 공개 평가를 진행해 합리적인 대학 교육체제가 무엇인지 논의를 해야 한다. 특히 대학 당국은 대학 본부와 교수들이 해당 대학의 학부제를 평가하기에 앞서 평가 틀을 제시해 학생들까지 함께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학부제나 학과제는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항이기에 이들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