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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학교육연구소 작성일 : 2014.04.13 조회수 :795
대학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대학생들을 직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등록금’이나 ‘대학구조조정’ 등과 같은 학내 문제에서부터 ‘민주주의 후퇴’, ‘실업난’, ‘민영화와 비정규직’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까지, 심지어 ‘선거’ 때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사회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과정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손을 내밀며 연대활동을 했던 과정에서 학생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래서 현실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지만 스스로 나서기 힘든 대중들이 학생들에게 대신 목소리를 내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고려대 한 학생이 시작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큰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다.
(이미지='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개설한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페이지 갈무리)
그렇다면 대학 현실이 어떻길래 학생들이 이러는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학생들은 지금 전쟁을 겪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매우 높고,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대학생들에게 졸업 이후 삶은 ‘괴물’ 만큼이나 두려운 존재다. 살아남기 위해 재학 기간 스펙 쌓기에 바쁘고, 졸업 자격을 갖추고도 ‘졸업유예생’ 신분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일자리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인데도 어느 순간부터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취업’과 연관되지 않은 무언가에 관심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고, 정치 참여는 고사하고 대학 동아리마저도 취업과 연계되지 않으면 학생 모집이 어렵다.
대학 교육비도 녹록치 않다. 소득에 따라 국가장학금을 지원 받을 수 있지만, 연간 8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기숙사비에 사교육비, 생활비까지 포함하면 대학 교육비는 연간 2천만 원에 달한다.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생계형 아르바이트 대학생도 많고, 장학금을 받으려면 일정 성적을 충족해야 하므로 학점 관리와 무관한 것들은 후순위다.
일각에서는 총학생회가 제 역할을 못해서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는 이가 없고 투표율도 매우 낮아 투표 기간을 연장하는 대학까지 있다. 학생회가 구성되더라도 간부조차 구하기 힘들고, 학생회비 징수도 잘 안 된다.
대학 당국은 이런 학생회를 돕기 보다는 활동 자체를 봉쇄하기 일쑤다. 진보적 인사들의 대학 강연을 학생회의 ‘정치색 짙은 행사’라며 불허하고, 학칙을 통해 정당이나 정치적 성향을 띤 사회단체 가입 금지는 물론이고, 학내 집회를 비롯한 집단적 행위 자체를 불허하기도 한다. 중앙대는 대학구조조정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가 징계 받은 학생의 장학금을 박탈하기까지 했다.
대학에서 비판적 목소리와 공동체 문화를 확산시키던 대학언론의 현실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편집권 침해는 물론이고 예산 삭감과 더불어 법인이나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 발행을 정지시키거나 심지어 발행한 신문을 회수하기까지 한다.
정부도 비판적 담론 형성과 같은 대학의 근본 역할에는 관심도 없다. 오로지 취업률 같은 지표로만 대학을 평가하고, 이른바 ‘장사되지 않는 학문은 문을 닫으라’ 강요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아낀다며 국립대학을 법인화하고, 사립대학도 다양한 방법으로 돈벌이에 나서라고 채근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평가나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대학생들 앞에 놓인 현실은 어렵다 못해 엄혹하다. 하지만 20대를 향해 표피적 위로와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식의 책들만 쏟아진다. 상황이 너무 힘든 학생들 역시 이들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학생들의 침묵은 본인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대학의 현실이, 이들을 침묵하며 오로지 경쟁해서 살아남을 것만 강요하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다. 따라서 대학생들의 침묵은 이런 사회적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쉽게 깨지기 힘들다. 대학의 현재적 모습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약육강식의 경쟁에 내몰려 있는데 대학생들의 침묵이 이해할 수 없다며 이들만 바뀌길 바라는 건 무리다.
지난해 말, 한 대학에서 시작 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게재 이후 불과 며칠 만에 전국 대학가로 확산됐다. ‘안녕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기성세대들마저 사회 현안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반향을 일으켰지만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원인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언제까지나 억눌려 있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시켜 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대학생들에게 비판도 하고 때론 야단도 칠 수 있지만 용기를 주고 함께하자며 손을 내미는 것이 더욱 필요한 시기다.
<이 글은 경희대 '대학주보'에 기고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