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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학교육연구소 작성일 : 2004.05.17 조회수 :606
지난 7일,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1600여명의 서울대 전체 교수들에게 A4 용지 4장 분량이나 되는 이메일을 보내, 서울대의 학사구조 개편 방향을 제시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따른 대책으로 발표한 것이 567명의 학부 정원을 감축하겠다는 것으로, 서울대를 학부대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는 첫 수순을 밟은 것이다.
학부대학은 인문·사회대를 중심으로 일정기간 정해진 학과 없이 폭넓은 기초·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공대·음대·미대·사범대 등은 전문직업영역대학(Professional College)으로, 대학원은 학술 위주의 일반 대학원들과 법학, 의·치의학, 국제 등 전문대학원들로 구성한다는 게 서울대의 장기적인 플랜이다. 정 총장은 계획 발표에 앞서 가진 학생들과의 면담 자리에서도 서울대는 조만간 미국 하버드 대학과 MIT를 합성한 모델로 전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구체적인 윤곽만 제시하지 않았었을뿐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겠다는 서울대의 입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된 바 있다. 70년대 박정희정권은 중화학공업 집중육성에 따른 고급기술자와 이를 육성할 교수인력의 단기육성을 서울대에 요청한 바 있고, 이에 서울대는 78년 최초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중심대학 특성화 계획’을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접어들어 졸업정원제 실시로 인해 학부정원이 두 배 정도로 늘어나면서 대학원중심대학으로의 전환계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연구중심대학의 집중육성을 대학교육 정책의 핵심과제로 내세움에 따라 서울대의 대학원중심대학 전환은 새로운 탄력을 얻어 추진된다. 역대 차등지원정책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을 퍼부은 BK21사업 역시 대학원중심대학 집중육성사업이였으며, 집중수혜대상은 역시 서울대였다. 즉, 해방이후 온갖 특혜를 받아온 서울대는 90년대 이후 대학원중심대학 집중육성의 명목으로 또다시 막대한 예산지원을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가 이러한 지원에 상응하는 질적 도약을 이뤄냈는지는 의문이다.
그간 역대정부의 대학교육 정책은 연구중심대학 정책처럼 서울대 중심으로 생산되어왔다. 서울대 출신 관료들이, 서울대 인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서울대를 중심으로 대학정책을 생산해 온 것이다. 때문에 대학원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을 골자로 한 서울대의 학사구조 개편방안은 우리나라 전체 고등교육 체제개편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대의 발표대로라면, 우리나라 전체 대학은 소수 몇몇 대학의 대학원중심대학과 대다수의 교육중심대학 혹은 실무중심대학으로 양분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육중심대학 혹은 실무중심대학을 표방한 대다수 대학들은 대학원중심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할 학생을 육성하는 교육하청기관 혹은 직업인양성소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학생들은 학부과정을 대학원진학을 위한 입시준비기관으로 인식할 것이며, 이로 인해 학부과정의 교육의 질은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에서도 학부과정을 소홀히 다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원중심의 체제 개편은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과 대학원과 미국 유학 이후에 사회진출을 하게될 인력의 고령화, 기초학문 붕괴 등을 낳아 대학 교육의 파행을 불러올 것이며, 연구중심대학 선정에서 배제된 대다수 대학의 대학원 몰락과 이들 대학의 반발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학원중심대학은 우리대학체제의 완전한 미국화에 불과하다. 연구중심대학과 전문대학원 체제가 안착된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밖에 없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러한 체제가 우리나라에 맞는지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미국식 제도를 차용하는 것은 지난 50여년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50여년간 미국식 체제와 이론을 모방해 온 우리나라 대학이 이처럼 경쟁력이 없는 것이 미국식 체제를 덜 따라 배워서란 말인가?
이제는 주체적인 사고로 우리 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비록 더디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고등교육체제 개편을 논의하는 것만이 진정한 발전을 이루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