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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학교육연구소 작성일 : 2003.05.12 조회수 :1,014
학부제 철회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작년 서울대가 BK21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교육부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학부제 철회 방침을 밝힌 데 이어 연세대도 오는 2005년부터 학부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동국대 또한 △문과대 △이과대 △공과대 등을 내년부터 학과제로 모집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점진적으로 학과제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상당수 대학들이 학교차원에서 학부제를 폐지하고 학과제로 회귀할 것을 확정하거나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져 학부제 폐지는 더욱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94년 도입된 학부제가 시행 10년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과거 ‘실험대학’과 너무도 흡사하다. ‘실험대학안’은 1972년 박정희정권이 학부 또는 계열별 모집을 골자로 추진한 정책으로 시행 10년만인 1982년에 학과별 학생 모집 및 학과별 교육과정 운영으로 다시 전환하여 완전 폐지되었다.
당시 이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오늘날의 학부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학이 백화점식 종합대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대학간 서열화뿐만 아니라 학문간 서열화마저 형성되어있는 구조에서 학부제의 성공적 도입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때문에 정부가 학부제를 도입하려던 90년대 초반부터 대학구성원들과 교육단체들은 또다시 실패로 귀결될 학부제 도입을 강력히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는 이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들 정부는 학부제가 외국대학의 우수한 선진제도라며 강력히 추진하였다. 김영삼정부는 94년 ‘학과 통합 정책 추진 계획’을 발표하여 학부제를 도입하였으며, 김대중정부는 한발 더나아가 ‘학문간 교류확대, 전공선택권 확대’를 내세워 학부제를 확대 시행하였다. 더욱이 김대중정부는 학부제 도입여부를 각종 대학평가 지표에 포함시켜 이에 따라 차등 지원함으로써 각 대학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학부제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학문적 연관성이 없는 학과 통합과 낮춰진 전공이수학점으로 인해 전공교육의 질은 크게 떨어졌으며, 학생들에게 부여된 전공선택의 자율권은 결국 비인기분야인 기초학문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대학들은 이 같은 위기를 이용하여 아예 기초학문 관련 분야를 과감히 폐과·폐강시키고 해당 교수들을 해직시키기까지 하였다.
원하는 전공을 택하기 위한 학생들간의 경쟁은 치열해져 학문탐구의 욕구와는 전혀 무관한 학점을 따기 위한 학습풍토가 만연하고, 이에 따라 대학공동체 생활의 필수인 동아리·학회활동도 눈에 띄게 줄었다. 또한 교육의 질이 부실해진 가운데 학생들은 취업위주, 흥미위주의 강좌로 몰리게 되었고, 교수들은 ‘생존’을 위해 학생들의 입맛에 충실한 웃지 못할 강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학부제와 관련된 대학의 모습은 대학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외국제도를 무분별하게 도입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비단 학부제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시장 논리를 맹종해 도입되었던 ‘대학 설립준칙주의’, ‘대학 정원 자율화’ ‘각종 대학평가와 차등지원 정책’, ‘교수 계약제·연봉제’ 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조짐들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학부제 전면 폐지를 비롯해 김대중정부의 교육정책을 전면 재평가하고, 새로운 교육개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시장논리가 아닌 ‘균형과 통합’에 기반하고, 외국대학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닌 우리나라의 현실과 조건에 맞는 교육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전 있었던 교육인적자원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내용은 과거의 정책과 노선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뿐, 지금까지 추진된 교육정책에 대한 냉철한 평가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창조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교육현장 주체들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들에 의하지 않고서 올바른 교육개혁이 추진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2003년 5월 12일